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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서평]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말로만 무수히 들어왔던 그의 책을 드디어 읽고 리뷰를 남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_서평]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 하루키가 오랜세월 계속해온 '달리기'에 대해 담은 에세이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하루키의  '달리기'가 궁금다기보다 하루키의 생각 방식과 문체가 궁금해서 였다. 그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효율적으로 내가 궁금한 것을 빠르게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계속해온 '달리기'에 대한 글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짐작하게 되는데 그의 성격이 대체로 그의 문체에 묻어나는 것 같다.


담담한 문체는 하루키 그 자신이다. 내가 인식한 그의 표현은 간결하고, 사실적이고, 상세하다. 그는 무척 성실하면서도 외부의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개인적이면서 눈 앞의 일에 높은 집중력을 가진다. 때론 고집스럽고 어딘가 허술한 구석도 있다.


하루키는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 인용구를 통해 면도에도 철학이 있다면 달리기에도 책 한권 만큼의 할 말이 있을 수 있으니까라며 그의 달리기를 축으로 한 인생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그가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킬로를 달려왔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롱런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착실한 달리기가 그의 인생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루키는 달릴 때 주로 록 음악을 듣는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나 고릴라즈, 제프 벡,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비치 보이스 같은 오래되고 되도록 심플한 음악을 듣는다. 그런 곡들을 요즘같은 시대에 손때가 묻은 MD에 담아 달리는데, 하루키가 아이팟을 꽂고 일본 핫 랭킹 탑100을 듣는 걸 상상해보니 그거보다는 MD가 뭔가 하루키다워 보인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지만 스물두 살에 결혼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음식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인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고 때문에 이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고 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몸소 배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성격이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해서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신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그에게 달리기는 정신적인 지지대, 내면의 치유, 자신만의 시간, 정신과 신체의 단련,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어쩌면 농담이지만ㅋ 우리 삼촌보다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그가 달리는 순간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 때의 공기와 풍경과 남은 거리와 신체의 상황과 가뿐 숨이 그려졌던, 독서를 여기서 마친다.



[문장 모음]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달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손을 움직여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 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것이다.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계속하는 것-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런 여러 가지 흔해 빠진 일들이 쌓여서-지금 여기에 있다. 카우아이의 북녘 해안에.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착실하게 달린다'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킬로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달리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의 인생을 사는 가운데 후천적으로 익혔던 몇 가지 습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익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인 러너는 "이번에는 이 정도 시간으로 달리자"라고, 미리 개인적 목표를 정해 레이스에 임한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적어도 나의 경우라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가슴으로 들이마시며, 오랫동안 달려 익숙해진 지면을 박차고달리는 기쁨이 생활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있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은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이라는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무역풍을 정면으로 얼굴에 받으며,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공을 질러 가는 백로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그리운 러빙 스푼풀의 음악에 귀을 기울이면서.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강이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자신을 모습을, 말하자면 자연 광경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 소리를(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올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에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무척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한는 것.


소설가의 자질 - 재능/집중력/지속력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비록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고 해도 나는 하루에 몇 시간인가는 반드시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의식을 집중하곤 한다"는 말을 개인적인 편지에서 밝힌 적이 있다.


거장이 될 수없는 세상 대부분의 작가들은 많든 적든 재능의 절대량의 부족분을 각자 나름대로 연구하고 노력해서 여러 측면에서 보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어떤 방법으로, 어떤 방향에서 자신을 보강해가느냐 하는 것이 각자 작가의 개성이 되고 특징이 된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다음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소설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리는 것이 낙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그런 실감을 동반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다리 밑을 지나는 강물처럼 교환가능한 자연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이야기하는 방법을 연습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이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고 하는 보람이 있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일상성에서 크게 일탈할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가 항상 그렇듯, 아마도 어떤 종류의 특별한 인식을 당신의 의식에 반영하는 결과를 낳는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관조에 몇 가지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당신 인생의 광경은 그 색깔과 형상을 바꾸어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많건 적건, 좋건 나쁘건, 나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변화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한낱 무기적인 기계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가려 하는, 한 사람의 직업적인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매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또 틀렸나?'하는 공포가 순간 뇌리를 스쳐간다. 약간 물을 먹는다. 재빨리 평영으로 바꿀까?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반드시 잘 해낼 수 있다.'

 



[하루키의 자연묘사]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북동쪽에서 쉬지 않고 불어오는 무역풍이 하와이의 여름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고 있는가를. 아보카도의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를 하거나 문득 생각이 날 때면 그대로 남태평양의 후미진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갈 수 있는 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한 기분으로 가득 차게 해주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물줄기는 강변을 적시고, 푸른 여름 초목을 무성하게 하고, 물새들을 키우며, 오래된 돌다리 밑으로 빠져나가, 여름 하늘의 구름 모습을 물 위에 띄우고(겨울에는 얼음을 띄우고), 딱히 서둘러 급한 걸을음 재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쉬어가는 여유도 보이지 않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오며 굳어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관념이라도 지닌 듯 그저 묵묵히 바다로 향해 간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깊고 울창한 초록빛이 조금씩 그윽한 황금빛에 자리를 양보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러닝용 쇼트 팬츠 위에 스웨트 팬츠를 겹쳐 입을 무렵이 되면,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춤추고, 도토리가 아스팔트를 콩콩 때리는 딱딱하고 메마른 소리가 주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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